2015년 7월 10일 금요일

UEA turnas sin eksteren kaj ekstereuropen.

  유네스코의 주최로 5월 중순 한국의 인천시에서 열린 3차 국제 교육 포럼(MEF)에서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KEA)와 협력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보여준 UEA는 그들의 관심이 유럽 외의 밖으로 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본 포럼에 앞서 무정부 기구(NRO)들의 기부와 정신에 이목을 끌기 위한 이틀에 이어 포럼만도 3일 동안 지속되었다. UEA는 그곳에서 그들의 자리를 확실히 찾았고, 실재로 유네스코 국가들에서 매우 규칙적으로 활동했다. 포럼의 공식 분과에 세 명의 대표를 받아들이게 한 성과는 그것을 증명하는데, 이들은 UEA의 임원인 이중기, KEA의 의장인 이영구, ILEI 한국 지사장인 박영승이다. 이 셋은 많은 유럽 외 국가 사람들 사이에서 30명 가량의 다른 대표들과 연결 관계를 갖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 .)

  포럼의 중심 화제는 "인류 전체를 위한 교육"이었으며, 부제들에는 갈등과 위기 속의 교육, 개인을 위한 재정적 지원, 양성 평등 교육, 고령화 시대의 교육 개선과 학습 과정에서의 기술의 역할 이 있었다.



kunlabore kun ~이 협력하여
meze de ~의 한 가운데에, 중엽에
efektive 그야말로, (=ja)



2015년 7월 7일 화요일

1. 2. 3.


1.
  나이가 스무 살 정도 되었겠다는 물음에 다소 강하게 자신은 스물 한 살이라고 강조하여 대답하는 친구를 보며 스무 살과 스물 한 살 사이의 일 년이 그 나이의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간들이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나에게도 그렇게 하루 하루가 소중하였던 스무 살 무렵의 나의 생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2.
  그 시절의 시간을 지금의 시간과 대비하여 바라본다고 하여 나에게 현재는 상대적으로 무의미 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류가 문명과 제도 속에서 살아온 이후의 역사들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현재나 미래의 것보다 더욱 거대한 것으로 확장시키는 행위임은 분명해 보인다.

3.
  당시의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나 많이 매일 반성하고 자정하는 것에 매달렸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성인 사회에 발을 들이는 나이이면서도 그 때까지도 여전히 간직할 수 있었던 순수함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언제부터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우리 자신과 세상과의 대결에서 우리가 승자가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리라.

pp. 35-


인터넷은 에스페란토가 활성화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매일 다양한 국가의 에스페란티스토들로부터 평균적으로 거의 20여 건의 소식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에스페란티스토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한다. 그들의 홈페이지에서 산더미만큼 많은 분량의 읽을 만한 글과 아름다운 노래들을 찾을 수 있다. 상상조차 못 할 만큼이다.
  42년 전 내가 에스페란티스토 청년이었던 시절에 나는 에스페란토로 쓰인 읽을 거리들을 찾을 수 없었다. 에스페란토를 통한 당시의 유일한 즐거움은 다른 나라의 에스페란티스토들과 종이로 된 편지나 옆서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유럽에 있는 나의 펜팔 친구의 답장을 받기 위해서 나는 정말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혹자는 에스페란토가 죽어가는 언어이고 세계에서 더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신은 이런 말들에 동의하는가? 전혀!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인터넷을 통해 당신이 필요한 훌륭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인터넷 덕분에 에스페란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에스페란토가 언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강하게 믿는다. 특히 유럽이나 국제 기구가 자리한 곳에서 말이다. 그러한 순간을 더욱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언어 능력을 기르고, 에스페란토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배출해 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은 매달 멈추지 않고 강의를 계속할 것이다.


Edzperanto?

  'Edzperanto'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나? / 'Edzo + Esperanto'

  이 단어는 유머있는 에스페란티스토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에스페란토가 국제 언어일 뿐만 아니라 결혼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언어임을 의미한다. 나는 주위에서 에스페란토를 통해 자신들의 짝을 찾은 적지 않은 부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에스페란토 커플들은 대게가 행복하고 조화롭게 잘 지낸다. 왜 그럴까?

  먼저, 공통의 언어 에스페란토 덕분에 그들은 비교적 쉽게 그들 각자가 서로의 유년기에 가진  다른 문화 배경에서 비롯한 격차들을 이겨낸다. 둘째로는,



2015년 6월 25일 목요일

pp. 31-34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자멘호프 박사의 초상화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에서는 모든 자멘호프의 후손들이 진심으로 숭상하는 자멘호프 박사의 초상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초상화는 문화원의 출입문 바로 옆 벽에 걸려있다. 며칠 전 일본인 동지 둘이 소식도 없이 문화원을 방문했고, 나는 그들을 독일에서 와서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Rainer Kurz 박사와 함께 자멘호프 박사의 초상화 옆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두 동지들 중 한 사람이 자멘호프 박사의 눈이 꼭 살아있는 것처럼 아주 맑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주의 깊게 초상화 속 그의 눈을 다시 살펴보았다. 정말 그의 눈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보통 벽에 있는 초상화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에 앉는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그의 두 눈은 내가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를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같다.
  이 초상화는 나의 딸 Arta가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에스페란토 대회를 기념하여 그린 총 다섯 점의 초상화 중 하나이다. 그 당시에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이었다. 초상화들 중 하나가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의 벽에 걸려 소소하지만 멋진 방을 지키고 있다. 나는 대부분 문화원에 혼자 있지만, 나는 항상 다른 누군가와, 자멘호프 박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마법에라도 홀린 것일까?
  혹시 궁금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의 문을 두드려 당신의 두 눈으로 직접 그를 만나봐라!


'Rondo Verdulo'의 'Fenestro'가 되지 않겠습니까?


  • 'Rondo Verdulo'가 무엇인가요?
  'Rondo Verdulo'는 우리들의 에스페란토 교학상장과 활용에 열중하기 위해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에서 창립한 에스페란토 동호회이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이중기 저의 "에스페란토 입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200개의 문장을 온전하게 잘 읽을 수 있는 에스페란티스토들이다.


  • 'Fenestro'는 무엇인가요?

  'Rondo Verdulo'는 전 세계에 걸쳐 에스페란토를 잘 읽는 Fenestro들을 갖기를 원한다. 동호회원들은 무엇보다 우선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에 등록된 Fenestro들과 우정을 쌓고 동지적 관계를 가질 것이다.


  • 어떻게 'Rondo Verdulo'의 'Fenestro'가 될 수 있나요?

  'Rondo Verdulo'의 'Fenestro'가 되기를 희망하는 한국 외의 국적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이중기(esperanto@saluton.net)에게 그가 당신에게 '200 문장'을 보낼 수 있도록 전자메일을 보내주세요. 만일 당신이 그 문장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Rondo Verdulo'의 'Fenestro' 자격을 갖춘 것이다.


  • 어떤 방법으로 두 파일을 받아볼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이 두 개의 파일을 받기 위해 스카이프(이중기의 스카이프 아이디는 'leejungkee'이다.)에 가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 파일들의 용량이 크기때문에 나는 파일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다른 인터넷 망으로는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카이프를 통해 전달하기를 바란다.
   또는 당신이 직접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의 홈페이지에서 자유롭게 오디오 파일을 내려받을 수도 있다.
  http://www.esperanto.co.kr
  홈페이지의 첫 화면에서 'Meza kurso'를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당신은 마음껏 'Nova sondosiero por 200 frazoj por nekoreoj(1~14)'를 내려받을 수 있다.


  • 'Fenestro'로서 당신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나는 당신에게 한국인 동호회 회원을 한 명 소개할 것이다. 당신은 스카이프와 페이스북을 통해 두 나라의 'Fenestro'로서 서로를 알아가고 우정을 쌓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에스페란토를 통해 서로의 나라들에 대한 각자의 지식을 더욱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까?

  이중기(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 원장)는 이 프로젝트의 주요 실무자이다. 그의 연락처는 다음과 같다.
  + 전자우편: esperanto@saluton.net
  + 홈페이지: www.esperanto.co.kr
  + 스카이프: leejungkee
  + 페이스북: Jungle Lee



2015년 6월 21일 일요일

Renkontiĝo kun Esperanta spirito


  나는 학부 시절에 불문학과 국문학을 함께 전공했다. 각기 다른 민족의 문학을 동시에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다양성과 상대성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자멘호프 박사가 민족주의의 이상을 집단 이기주의로 보아 경계했던 것처럼 특정 언어권과 민족을 단위로 하는 두 학과의 수업에서 일부 교우들이 보이는 집단 이기주의적 태도를 경계하려 했는지 모른다. 사실은 나 자신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그나마 문학을 공통 주제로 여러 입장의 목소리들을 접함으로써 상대적 가치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에스페란토 어가 각 민족의 문화가 지닌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기조로 한다는 점에서 그 언어보다는 정신에 먼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에스페란토 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 이상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을 가졌다. 하지만, 에스페란토 어를 배우면서 에스페란토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선생님들과 에스페란티스토 동지들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생애의 거의 전부를 에스페란토 운동에 힘쓰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도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거나 식자층의 점잖은 취미라는 따위의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신념 앞에서 ‘평등’, ‘정의’, ‘대화’를 통해 평화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을 보고, 누구도 그것을 폄훼하거나 가능성 여부를 저울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토 어를 배운지 얼마 안 되어 상해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에스페란토 정신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낯선 도시에서의 소소한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였다. 

  방문 기간의 대부분을 상해에 거주하는 선배의 집에 머물렀다. 선배의 집이 있던 지역은 상해의 중심과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주거 단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한국인의 거주 비율이 높아 거리에서 종종 한국어 간판을 볼 수 있었으나, 관광지에서와는 달리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마주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상해 인근의 도시들을 돌아본 시간들을 제외하면 일주일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도시의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의 모습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출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에서 일행과 떨어졌다가 목적지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였고, 어느 저녁에는 퇴근하는 선배를 기다리며 지하철 입구 앞에서 장관을 이루는 오토바이들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밤이면 어김없이 아파트 단지 앞에서 꼬치구이 포장마차가 피우는 메케한 연기와 고기 굽는 냄새를 맡았다. 선배의 집 아래에 있던 상가들 중에는 이번에 나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마라탕 가게가 있었고, 퇴근 시간이면 과일을 사가는 직장인들이 몰리던 과일 가게도 있었다. 어떤 이는 마라탕 가게에서 저렴한 가격에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있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과일 포장지를 뜯어 과일만 장바구니에 담아 가기도 하였다. 떠오르는 전부를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들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내가 가졌던 생각은 인류적 차원의 삶의 모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류적 삶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은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에스페란토 정신을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중립적 인간관을 기초로 다른 사람과 대화와 소통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자멘호프 박사의 인류주의 사상이 의미하는 박애, 평등, 평화, 정의의 의미를 낯선 도시의 일상을 바라보며 떠올려 보았다.


2015년 5월 21일 목요일

pp. 28-30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브라질에서 온 나의 동지, Mario Jose De Menezes

  브라질의 에스페란티스토 Mario Jose De Menezes가 Veramo(장진수), Gloro(송호영)과 함께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을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브라질의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2007년 요코하마 국제 대회에서 그를 만났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추후에 나는 그의 숙소가 나와 같음을 알았다. Veramo와 Gloro 역시 나와 같은 방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대회에서 이미 그와 친해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분명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대회 기간 동안에 그들의 관계는 깊어졌고, 후에 Mario의 발걸음이 서울로 향하게 했다. 그와 함께 나는 'Laulian'라는 이름의 카페로 향했다. 그곳은 Lauli(안준모)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는 중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을 하는 에스페란티스토이다.
  Vigla(로승임)은 우리를 맞아주었고 전통 한식당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으레 그녀는 우리를 위해 세 사람 분의 식사를 주문했다. 이윽고 우리 앞에 요리들이 마련되었다. 잠시 맛을 보면서 마리오는 자신은 보통 저녁을 먹지 않으며, 더욱이 점심을 두 명의 관광 안내원들과 함께 배불리 먹었다고 말했다.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있을까! 종종 '으레 당연한 것'은 '예상치 못 한 일'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이 경험에서 주문을 하기 전에 그 혹은 그녀가 식사를 할지 안 할지를 물어야 함을 배웠다.

  당신의 좋은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Mario.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Julian Modest

  사람들은 언어의 꽃이 문학이라고들 한다. 에스페란토어는 자연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의 훌륭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에스페란토어로 저술된 문학 작품은 에스페란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정말 소중한 보물과도 같다. 

  에스페란토 나라들 중 하나에서 에스페란토어로 저술된 적지 않은 양의 창의적인 저작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 중에서 요즘은 불가리아의 작가 Julian Modest를 알게 되었다.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문학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고, 결국은 그의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왜 내가 그의 작품들을 추천하는 걸까?

  그의 에스페란토 문체는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이해하기에 아주 쉽다. 보통 유럽의 작품들은 유럽식의 표현과 복잡한 문체 때문에 유럽 외의 지역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이해하기에 어렵다. 하지만 Julian의 소설들은 이를테면 보통의 유럽 작품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그의 문학 세계는 동양의 문화에 기반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책을 읽다가 종종 이 작품이 아시아의 것이 아닌가 하고 놀라게 된다. 그의 소설들은 감동, 인간애,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을 향한 어떤 호소력을 선사한다.

  나는 그의 소설들이 당신이 다음에 읽을 책으로 삼는 것을, 그의 문학 세계를 맛보는 것을 강하게 추천한다. 얼마 후에 나는 마침내 그의 단행본 열 권을 손에 넣었다. 아래는 독서가들을 위한 제목들이다.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pp. 26-27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중국, 짜오좡 시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만나다

  중국 산동성에는 짜오좡 시라는 작은 도시를 찾아볼 수 있다. 짜오좡 시 에스페란티스토 협회(ZES)의 부의장을 맡고 있는 SUN Mingxiao(Semio) 선생은 2006년에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KEA)에 편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중국의 ZES와 한국의 KEA가 함께 '제1회 짜오좡 시 국제 에스페란토 페스티발'(2006. 8. 11. ~ 8. 14.)이라는 이름의 공동 대회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을 보면서 나는 그가 정말 그렇게 작은 지방 도시에서 국제 행사를 개최할 수 있을지 조금 의심했었다.

  그들의 적극성과 열정 덕분에 나는 공감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번 대회를 위해 서로가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눈 후에 나는 마침내 13명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여행단을 꾸렸다. 칭타오 시에서 짜오좡 시까지는 버스로 거의 5시간에 이르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버스가 행사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하였다.

  이미 50명 가량의 동지들이 모여있었고,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였고, 곧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짜오좡 시의 시장 또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곳의 향토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이 마련된 화려한 호텔 객실에서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언어와 사상의 벽을 넘어 그들 문화를 즐기고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놀랍게도 그곳 도시 공원에서는 아름답게 장식된 자멘호프 박사의 흉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나의 기억에 따르면 그 자멘호프 박사의 흉상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흉상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선대 스승들의 고귀한 정신을 떠올렸고, 에스페란토를 향한 우리들의 열정을 다짐하였다. 

  우리는 옛 성현의 한 사람인 공자의 탄생지를 관광하였다.

  2007년에 나는 5명의 한국인 동지들과 두 번째 페스티발에 참가하였다. 여기 나는 열렬한 응원과 감사의 마음을 멋진 페스티발을 개최한 짜오좡 시에 있는 동지들에게 전한다. 용기가 없이는, 에스페란토를 향한 격렬한 애정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조건들이 기반되었었더라도 처음 국제 행사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젠가 역사가들은 그들의 야망과 도전을 분명 높게 평가할 것이다.

  최근에 나는 짜오좡 대학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에스페란토 관련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국제 에스페란토 박물관'을 개관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Gratulon! Karaj samideanoj en Zaozhuang.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pp. 22-25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나의 오랜 친구, Sandor와 Helen

  오늘은 Sandor와 Helen이 서울의 근방에 위치한 안양이라는 도시에 방문했다. 5시에 범계역 2번 출구 앞으로 나는 그들을 마중나갔다. 그들이 역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려서 나는 자전거로, 그들은 뛰어서 나의 집으로 향했다. 소박한 나의 집에서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난 지난 새로운 소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2000년에 나는 Natura(정현주), Inda(종병미), Orkido(박미란)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에스페란티스토들의 여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다. 그때 나는 Sandor를 만났고, 지금까지도 진실한 친구이자 동지로서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Sandor는 올해 갑자기 수원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아마도 에스페란토가 그를 한국에 오게 한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 그의 아내 Helen이 한국을 여행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이 일하고 있는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한국에 있는 산들의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여러 산들을 찾아 다닌 그녀의 첫 행보를 볼 때 그녀는 근면한 건강 관리자이다.

  "Helen, 한국의 산이 어때?"
  "매우 아름다운 산들이 여행하기 좋아. 그리고, 맑은 공기가 참 마음에 들어."

  그녀는 등산을 하고,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만나고, 그녀의 남편을 도우면서 한국에 세 달 간 머물렀다. 나는 그녀가 좋은 추억들을 갖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서 그녀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산들이 매우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정말 에스페란토가 그들과 한국을 연결해 주었다. 열흘 뒤에 나는 그들을 서울에 있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에서 열린 39번째 한국 에스페란토 대회에서 다시 만났다.(최근에 나는 Sandor가 오스트레일리아 에스페란토 협회의 의장으로 당선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에스페란토 운동에 큰 공헌을 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Gratulon!)


  나의 친애하는 친구, Aleksandr Titajev

  1992년에 나는 '5개국(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국제 심포지엄'이라는 이름의 국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의 에스페란티스토 나라에 방문하였다. 그 행사는 Rondo Pacifiko(의회장 겸 교수인 Aleksandr Titajev)가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심포지엄에서 처음 Titajev 교수를 만났다. 그는 키가 컸으며, 첫인상이 학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러시아의 머나먼 극동 도시에서의 잊을 수 없었던 나들이와 함께 이 심포지엄을 잘 진행해 나아갔다. 하바롭스크 주변 지역의 역사에서 그 곳 동지들과 작별할 때에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그의 학교 업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는 서울에서 좋은 만남을 가졌다. 그는 공학 교수로서 매우 호감가고 예의바른 학자이다.
  2012년 10월 14일 나와 거의 동갑내기였던 나의 친구는 불치의 암으로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 소식을 듣고 몇 시간 동안 그의 순수했던 모습과 조용한 목소리가 내 주위를 떠돌았다. 비록 그가 이 세상에 없을지라도 그의 부드러웠던 표정은 나의 가슴에,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남아있을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친구 Aleksandr Titajev여, 하늘 나라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쉬기를.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pp. 19-21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헤르츠베르크에 세워진 자멘호프 박사의 흉상

  2009년은 자멘호프 박사의 탄생 150주년이다. 마침 그 해에 나는 독일의 에스페란토 도시인 헤르츠베르크의 안내원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도시에서 자멘호프 박사의 흉상을 세워서 이 해를 기념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에스페란토 도시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멘호프 박사를 기리는 사람들에게 모두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가 되는 이벤트일 것이다. Petro Zilvar와 Zsofia Korody는 기꺼이 선뜻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곧바로 국제 무역 분야에서 능력있고 성실한 나의 중국인 친구 WANG Tianyi(국제 무역과 경제분과에서 최고 의장)에게 자멘호프 박사의 흉상을 만들기 위한 흰 대리석을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마침내 중국에서 제작된 동방의 자멘호프 흉상이 자멘호프의 날 직전에 헤르츠베르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2009년 12월 15일 도시 공원에서 기념식이 열렸으며, 시장인 Gerhard Walter 선생과 헤르츠베르크의 에스페란티스토들에 의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꿈에서 만난 나의 할머니

  오늘은 음력으로 2013년 1월 1일이다. 어제는 꿈에서 나의 돌아가신 할머니를 뵈었다. 할머니는 부모님의 유학 때문에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셨었다. 우리가 함께 지낼 때, 나는 할머니의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나의 우둔함과 미숙함 때문에 그 때에 그것을 몰랐다.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마침 그 때에, 나는 할머니의 곁에 있어드릴 수 없었다. 당시에 내가 하던 일이 바빴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핑계일 뿐이었다. 부모님이 할머니께서 나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셨다고 할머니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전해주셨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잘못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어제는 나의 세 손자들이 새배를 하기 위해 자기들의 부모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애석하게도  할머니께서 떠나신 지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세 손자들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런 못난이가 있을까! 결국 30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나의 커다란 실수와 심각한 잘못을 깨달았다. 내가 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나 역시 나의 사랑하는 손자들의 손을 꼭 잡고 싶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께 나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면서도 지금의 나는 나의 마지막 순간에 손자들이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 오! 30년 전에 내가 할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아드렸다면 할머니께서는 더욱 편한 마음으로 가실 수 있었을 텐데. 아마도 할머니는 나의 손을 어루만저 주시기 위해 꿈에 나타나신 것 같다. 아, 나의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나의 할머니 부디 편히 쉬시고 하늘 나라에서 이 못난 손자를 용서해주세요.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pp. 17-19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에스페란토어를 통한 두 종교 사이의 공조, 원불교와 오모트교

  에스페란토 나라에서는 두 종교 사이의 아주 특별한 협력과 교류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한국의 원불교와 일본의 오모트교이다.
  오모트교는 창시자 Deguchi Nao에 의해 1892년에 일본에서 생겨났고, 이미 그 처음 시작부터 에스페란토어를 받아들였다. 5번째 정신적 지도자 Deguchi Kurenai 또한 실력있는 에스페란티스토이다. 에스페란토 나라에서 사람들은 에스페란토 세계의 운동을 위한 오모트교의 공헌을 높이 평가한다. 오모트교는 '데구치 상'이라는 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UEA에 헌납하였다. UEA는 해마다 에스페란토어를 통해 국제적 친교와 연대를 추진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영광스럽게도 2002년의 상을 내가 거머쥐었다.
  한편, 원불교는 1916년에 한국에서 생겨났다. 이 종교는 현대 한국의 여러 거대 종교들 중에 하나이다. 2007년에 '원불교 에스페란토 협회'가 원불교 종파의 국제 분과에서 공식적인 인가를 얻었다. 5번째 주지 스님인 Gxausano 또한 홍성조 선생과 최태석 선생에게서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다. 에스페란토를 향한 그의 진실한 애정으로 2003년에 에스페란토어가 원광대의 교양 과목들 중에 하나로 공식적인 인정을 얻었다.

  1980년 이래로 두 종교는 각 종교의 행사들을 위해 더러는 그들의 대표들이 종종 교류한다. 최근에는 국제 에스페란토 영성 만남(IERM)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열린 국제 행사에 오모트교에서 그들의 대표를 delegadas.
  현재 원불교의 에스페란토 협회는 2013년 5월 31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리는 '에스페란토 보급 협회(EPA)의 설립 90주년 기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두 종교는  아주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수도사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언어의 장벽과 종교적 격차를 넘어 자멘호프 박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에스페란토어를 통한 두 종교 사이의 이러한 협력과 교류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2015년 5월 12일 화요일

Leteroj en Sxanhajo


2015-04-25 10:51
TITOLO: Kara sinjoro Wang.

Saluton.
Mi estas Sungwun. Mia Esperanta nomo estas Nubo. Mi ricevis vian adreson de mia Esperanto-instruisto, Sxlosilo. Mi audis ke S-ro Sxlosilo diris al vi pri mi.

Mi eklernis Esperanton antau du monotoj en Seoula Esperanto-Kulturcentro. Mi ne parolas Esperanton bone, sed mi volas renkonti eksterlandan Esperantiston. Kaj ekspresso, iam mi vizits iu lando, mi volas paroli kun iu homoj de la lando per Esperanto.

Nun mi estas en Sxanhajo por renkonti mian amikon kiu havas laborejo cxi tie. Dum mi vizitas en Sxanhajo, mi restas en la domo de mia amiko, apude metropoliteno '合川路'.
Se mi povas renkonti kaj paroli kun vi, mi preparos kelkajn demandon por mi vidas Sxanhajon kaj Esperantiston kiun logxas en Sxanhajo.

Mi atendas vian respondon.


2015-04-25 21:18
TITOLO: Re:Kara sinjoro Wang.

Kara Nubo,Saluton!

Mi ghojas, ke vi nun vizitas nian urbon. Mi nur morgaux estos en Shanhajo, char postporgaux mi flugos al urbo Kunming, kie okazos la tutlanda kongreso de Esperanto kaj Ferfojista kongreso maje. Mi preparos por la du kongresoj tie
Se vi havus la shancon, bonvolu partopreni en la du kongresoj maje en Kunming.
Mia telefonnumero estas 1~.

Fartu bone!

amike via
Minhao Wang


2015-04-28 12:01
TITOLO: Saluton, s-ro Wang.

Saluton, s-ro Wang.

Mi pardonon de malflua respondi.
En Sxanhajo, mi ne povis uzi interreto libere.

Morgau mi iros al Suzou kaj mi revenos en Sxanhajo en la 1 majo.
Kaj en la 3 majo, mi iros al Seulo.
Se vi revenos en Sxanhajo antau mi foriros, mi volas renkonti vin ankorau.
Sed, se vi ne havas libertempon, mi deziras iam kaj iam renkonti vin, kaj persisti kontakto per interreto.

Dankon, gxis.


2015-04-28 18:06
TITOLO: Re:Saluton, s-ro Wang.

Kara,

Mi nun en Kunming por preparlaboroj de la 11-a Tutlanda kongreso de Esperanto kaj la 67-a IFEF-kongreso, kiuj okazos samtempe venontmaje en Kunming. Mi estas cheforgazizanto, pro tio mi nun laboras tie.
Pardonon! Mi ne povas renkontighi kun vi en Shanghai chifoje. Tamen mi volas vidi iam. Vershajne mi vizitos Koreion oktobre por partopreni la landa kongresdo en Seulo.

Bonan vojaghon en Chinio!

amike via
Minhao


pp. 15-16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Reta Libro-vendejo de SEK(www.esperanto.name)








  자신에게는 근검하였지만 에스페란토를 위해서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가 KEA의 의장이 되었을 때, 임원 회의는 관례대로 KEA의 사문실에서 열렸다. 그는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대구에 살고 있었으므로 회의를 앞두고는 숙소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어느날 저녁 나는 그를 그가 예약한 숙소까지 배웅하였다. 나는 그가 호화로운 호텔에서 묵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서울의 어느 거리 구석에 있는 상상할 수도 없이 허름한 곳이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동안 난 방을 볼 수 없어요. 나는 의미 없는 곳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아요. 좀 더 가치있는 데에 돈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요, 그렇죠?"
  1995년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의 50번째 수업 기념'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그는 그가 살고 있는 대구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이 행사에의 그의 참석은 나에게 큰 영광일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참석자들에게도 큰 영광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의 차비가 적지만은 않은 금액이었기 때문에 그의 차비를 내가 지불하였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조촐한 금액조차도 받지 않았다. 사실 그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어느 에스페란토 만남의 시간을 축하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까지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에스페란토 운동을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는 데에 인색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안녕을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엄격하게 절약하였다.


  에스페란토를 향한 그의 열정

  에스페란토를 향한 그의 사랑은 끝이 없고 열정적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그는 언제나 에스페란토를 확산하고, 새로운 계획들의 시행과 우리 운동의 리더들을 일하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멈추지 않고 새롭고 참신한 제안들을 제시했다. 우리들의 운동을 위해 기여한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을 회상하기 위한 '선구자의 낮'. KEA에 가장 많은 회원을 가입시킨 사람을 위한 '에스페로 상'(현재의 '이종영 상'). 또, 그는 스스로가 에스페란토어 또는 한국어로 된 많은 서적들을 발행하였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분명 그는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에 있어서도 눈부신 공헌을 했을 것이다. 너무나 애석하게도 그는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1932-2008). 그는 그의 생에서 언제 어디서나 진심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사랑했다. 비록 그가 우리를 멀리 떠났을지라도 그의 에스페란토를 향한 사랑은 영원히 자멘호프 박사의 후예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2015년 4월 21일 화요일

pp. 14-15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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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비록 그의 발은 땅에 있을지라도 그의 눈은 앞으로 난 길을 향했다. 그는 앞으로 몇 년 후에 에스페란토 계에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한다. 그런 예견 능력을 통해 그는 앞으로의 에스페란토 운동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처음으로 1994년 서울 국제 에스페란토 대회를 제안하였다. 굳건한 신념과 함께 그는 KEA의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당시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 중에 여럿은 한국에서 국제 대회를 개최하는 것에 비관적이었지만, 서울 국제 대회 후에 당시 UEA의 임원이었던 Simo Milojevic 선생은 서울 국제 대회가 지금까지의 성공적인 국제 대회 중에 하나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우리의 운동을 위해 쉬지 않고 새로운 제안들과 건의들을 만들었다. 식량, 농업과 관련한 UN 단체에서 고위 관리로 있었던 그의 국제 환경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는 스스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전 세계적인 운동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2015년 4월 19일 일요일

p. 13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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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선배들에게 감사하다

  지금까지 에스페란토를 통해서 나는 78번 국제 에스페란토 총회에 참석했다. 이만한 이벤트들에서 나는 이벤트의 진행자들이 얼마나 진솔하고 친절한 사람들인지, 이벤트 진행자들 뿐만 아니라 참석자들도 만남을 마음껏 흥겹게 즐기고 있었음을 유념하여 보았다. 나는 국적을 넘어서 에스페란토 언어가 인류를 단결시키고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음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나는 1887년에 인류의 조각난 언어 장벽을 허물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창안한 자멘호프 박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하게 여긴다. 그 때문에 각각의 만남들이 나에게는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이었다. 나의 에스페란토 삶에서 나는 에스페란티스토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웠고, 에스페란토는 나를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채워주었다. 내가 만난 한국에서의 에스페란토 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선열들의 이름을 적어보며 나는 나의 에스페란토 삶을 완성하고 싶다. 나는 그분들에게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교육을 받았다. Espero 신 선생, Hajpin 이 선생, 김교영 선생, 김창진 선생, 양희숙 선생, 최봉열 선생, 이종하 선생, 이종영 선생, 강봉길 선생, 박강 선생, 그리고 종선태 선생. 에스페란토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나에게 정말 보람 있는 일이다. 그 때문에 나는 대학에서든지, SEK에서든지 나의 목소리가 나오는 날까지 에스페란토 강습을 계속해 나아갈 것이다. Koran dankon.


2015년 4월 18일 토요일

pp. 11-13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Verkita de LEE Jungkee(Sxlos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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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페란토 문화원을 개설하다

  KEA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우리 운동의 성공이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을 산출하는 것에 있음을 결론내릴 수 있었다. 에스페란토 운동은 에스페란토어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에스페란토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덕분에 발전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을 산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에 사뭇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KEA의 사무처장 직책에서 실패를 경험함에 따라 나는 1991년 12월 15일 서울시 서강동에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SEK)'을 개설하였다. 당시의 나의 이러한 도전은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의 눈에 합리적이지도 않고, 무모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거의 무일푼으로 두 맨 주먹만으로 돈키호테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었다.

  꼭 1년 뒤에 문화원의 예산 전부를 건물 소유주에게 빼앗겼다. 결국 SEK는 여의도에 있는 최학선 선생의 사무실로 옮겨야 했고, 그리고 또 얼마 후 다시 이종온 선생의 호의로 양정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나는 이 선생이 친절하게 마련해 준 장소를 한 번 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강의실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에스페란토어와 문화원을 사랑하는 많은 동지들에게 감사하게도 운 좋게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명동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에 옮겨올 수 있게 한 그들의 도움에 감사함을 전한다. 나의 전 생에서 SEK의 강습소를 위해 돈에 인색하지 않았던 그분들을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이다.


  2008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2008년 2월 13일, 인도에서 열린 5회 아시아 에스페란토 대회에서 내가 UEA의 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 위원회(KAEM)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지구 인구의 61 퍼센트가 살고있는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면에서 그 임무는 나에게는 부담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나는 아시아에서 '에스페란토' 언어가 한창인 이 때에 이 언어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국제 언어로서의 역할을 할 것임을 항상 강하게 믿는다. '아시아에 활기를 불어넣자!' 라는 슬로건 아래 아직 에스페란토의 씨가 전파되지 않은 곳에 에스페란토어를 전파하기 위해 나는 2009년 라오스를 방문했다. 나의 은사이신 이종영 의사는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 운동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함을 유념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만일 내가 그의 말을 오늘날까지 따를 수 있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2008년 8월 30일, SEK의 200번 째 강습이 있었고, 'SEK의 200번 째 강습을 기념하며' 라는 타이틀과 함께 서울의 남산에 위치한 유스호스텔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 기념회에 대략 200명의 동지들이 17년에 걸쳐 에스페란토 교육을 끊임없이 지속시켜 이룩한 SEK의 200번 째 강습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나는 지치지 않고 500번 째 강습까지 에스페란토를 전파할 것이고, SEK를 거쳐간 과거의 강습생들을 찾아 그들을 에스페란토의 장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현재는 2012년 11월 3일, 서울의 남산 유스호스텔에서 'SEK의 250번 째 강습을 기념하며'의 기념 행사를 가졌다.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p. 10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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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A의 비서관으로서 일을 시작하다

  3년 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난 뒤에 나는 국제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그 후에는 에스페란티스토인 종선태 선생이 창립한 다른 회사에서 사원으로 일을 하였다. 1983년 초에 나는 당시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의 사무처장인 신종태 선생의 업무를 인계받아 KEA의 사무처장으로서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때 단국 대학교의 총장이었던 장중식 의사가 KEA의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나는 KEA의 사무처장으로 두 번 근무를 하였는데, 첫 번째 근무의 기간은 1983년 1월부터 1985년 1월까지, 그리고 두 번째는 1987년 1월부터 1991년 10월까지, 결국 나는 사무처장으로서 6년 10개월 동안 일을 하였다. 이렇게 나는 에스페란토와 함께 나의 황금빛 유년 시절을 지냈다. 



ne nur ~ sed ankau


104. Mi trovis, ke mia nova konato estas ne nur tre afabla, sed ankau tre kulturita kaj interesa.


Li estas ne nur pasia, sed ankau subtila.

Mi miskomprenis, ke sxi estas ne nur pretendema, sed ankau vanta.

La fer-rubo estas ne nur akra, sed ankau tre varma.

La glacio estas ne nur malvarma, sed ankau glita kaj klara.


2015년 4월 16일 목요일

pp. 8-10


Eldonita en la 20-a de majo,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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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페란토와 만나다

  1971년 3월, 내가 이제 막 영남 대학교의 학생이 되었을 무렵 나는 운명처럼 에스페란토를 만났다.

  이미 에스페란티스토가 되어 있던 나의 친구 한덕섭의 추천으로 나는 대학교 에스페란토 클럽에 가입하였다. 그때 이 클럽은 몇몇 에스페란티스토들에 의해 이제 막 만들어진 클럽이었다. 내가 아직 기억하기로는 이영우와 박의건이라는 이름의 두 선배들이었다.

  이영우 선배는 나에게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 위해 점심 식사 후 12시 반에 강의실로 오라고 말했다. 나의 에스페란토어 공부는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매일 30분씩 계속되었다. 당시 법학과의 이종하 교수님은 우리 클럽의 멘토이셨다. 우리의 작은 클럽실이 학교 안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신 교수님의 도움에 감사하다.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들과 만나다

  1971년 4월의 시작에 가까스로 에스페란토어 기본 코스를 마쳤을 무렵 대략 20명남짓의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어를 통한 한국과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들 사이의 학술 모임을 갖기 위해 대구시를 방문했다. 이 행사는 대구 은행 강당에서 열렸다.

  한국측에서는 이종하 교수님이 '이 씨 왕조의 법치 체계'에 대해 강의를 하셨고, 강봉길 선생님은 '한국에서의 에스페란토 운동'에 대해 강의를 하셨다. 사실 이 강의들은 이제 막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는 퍽 감동적이었다.

  공식적인 만남이 끝난 뒤 곧바로 나는 비록 초보 에스페란티스토였음에도 고대의 도시 경주로 향하는 여행객 무리의 뒤를 따랐다. 사실 이 만남은 내 스스로가 백 퍼센트 열렬한 에스페란티스토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강한 동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모임 뒤에 나는 구불구불한 에스페란토어로 Wada Masko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녀는 여행객 무리 중 하나로 교토에서 수학 교사로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녀가 나에게 보낸 이쁜 엽서를 한 장 받았다. 그 엽서는 나를 에스페란토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함께 에스페란토의 세계로 빠지게 했다.

  우리의 첫 번째 소통 이후 12년 뒤, 1983년에 일본인 에스페란티스토들의 70번 째 대회가 일본 Oomoto교의 성지로 꼽히는 Kameoka에서 열렸다. 그 연회에서 나는 우연히 테이블 옆자리에 앉은 그녀와 재회했다. 그때 그녀 곁에는 그의 딸 'Amiko'가 있었고, 그녀의 성은 그녀의 남편의 성을 따라 TAHIRA로 바뀌어 있었다. JEI(Japana Esperanto-Instituto)의 외무의 임원과, UEA의 위원을 역임한 TAHIRA 선생은 우리의 운동을 위해 국제적 규모로서도 얼마나 활동적인지. 나는 개인적 경험을 기초로 새로운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초보자들에게 커다란 동기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이 외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만날 것을 강하게 추천했다.

   

Senlaca semanto de Esperanto



지칠 줄 모르는 에스페란토 파종자


  한국의 수도, 서울의 움직임이 가득한 중심에 조용한 오아시스,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이 있다. 그곳의 주인은 유명한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 이중기이다.

  이중기 씨는 44세이다. 26년 전 그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982년에 그는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우리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 상의 관계를 설립하기 전인 1989년에 만남을 가졌다. 나는 한국에 방문한 첫 번째 에스페란티스토로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는 에스페란티스토 인터뷰를 승낙받았고 이중기 씨를 따라 에스페란토 그룹들과 에스페란토 수업에 참여하는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과 함께 만났다. 그도 마찬가지로 중국에 방문한 첫 번째 한국인 에스페란티스토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북경에서 열린 71회 UK를 떠올렸다. 공통의 이상은 곧바로 우리를 친밀한 우애를 쌓게 했다. 그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두 나라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아시아의 에스페란토 운동을 위해 자주 만남을 갖기를 바랐다.

  1990년에 이중기 씨는 서기장의 직책을 포기하고 두 명의 에스페란티스토들과 함께 에스페란토 서적과 간행물 들을 판매하기 위해 Librejon Gaja를 설립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아 그 두 명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그만 포기했다. 하지만 이중기 씨만은 남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서점은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 책을 구입하고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장소다.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없더라도 나는 그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도심에서 그 책들의 정리와 번역을 했고, 그곳의 명칭을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으로 바꿨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아무도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에는 보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정오 이후에는 문화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책들과 간행물 들을 발송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쳤다. 그는 종종 밤 11시나 되어서야 귀가하기 일쑤였다. 30제곱미터의 방에는 에스페란토 관련 책, 간행물, 카세트 테잎, 비디오, 메모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책을 구입하고 에스페란토어를 읽거나 배우기 위해 매일 방문했다. 또한 외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방문하기 위해 찾아왔다. 1995년 11월에 나는 그곳에서 타지키스탄에서 온 에스페란티스토를 만났다.


  에스페란토를 선전하기 위해서 이중기 씨는 매달 초급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연다. 거의 4년 동안 46강이 열렸고, 360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누구든 지속하여 중급 코스를 공부한다. 나는 3개월도 안 배운 학생들이 나와 함께 빠르게 말을 할 수 있던 것에 경탄했다. 나는 이중기 씨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고, 그는 대답했다. “그들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그는 머리를 많이 썼다. 강연에서 그는 가능한 많이 에스페란토어를 말하고, 외국 에스페란티스토들과 대화하고, Cxina Radio Internacia의 에스페란토 프로그램을 경청하게 한다. 그것은 학습자들에게 흥미를 끌게 할 뿐만 아니라, 학습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게 했다. 그는 그의 학습자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그들이 점점 에스페란토에 반하게 하는 에스페란토 모임에 함께 참여한다.

  이중기 씨는 또한 아마추어 라디오를 취미로 한다. 그는 종종 외국인들로부터 초청을 얻는다. 그는 아마추어 라디오인들이 많음에 주목한다. 그는 그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언제라도 정력적으로 그들에게 에스페란토어를 선전하고 초대한다. 그들이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고 사용하게끔 장려한다. 그에게는 감사하게도 73명의 아마추어 라디오인들이 에스페란티스토가 되었다.

  내가 그에게 왜 수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원을 계속하느냐고 물었고, 그가 대답했다. “많은 나의 친구들이 나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왜냐하면 나는 에스페란티스토이자, 평화, 우애 그리고 진보가 나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이 일을 한다.” 그는 또 말한다. “현재 아시아의 에스페란토 운동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 한국과 중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좀 더 많이 힘써야 한다.”

  이렇게 존경할 만한 에스페란티스토가! 우리 중국인들이 이를 따른다면 우리의 에스페란티스토의 장은 항상 번창할 것이다.